그리스 신화 속의 여신 클리오는 역사를 담당하고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며, 여신 칼리오페는 서사 문학과 언변술을 주관한다. 이 두 여신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매로, 역사와 문학은 그 뿌리가 같다. 이 둘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때로는 역사가 이야기가 되고, 문학이 역사의 기록이 되기도 한다. 역사와 문학이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이유이다. 문학이나 역사 모두 서술을 위해서는 ‘언어로 이루어진 구조’가 필요하다.
역사가는 역사의 교훈을 예시로 대중을 계도하거나, 아니면 이들이 역사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도록 조력자가 되기도 한다. 전기(傳記)는 어떠한가? 전기는 집필 의도, 서술 방식, 구성 요소에서 절반은 역사기술에 기대고 있고, 그 기능이 역사기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기 또한 현재의 관심사에서 출발해 계도와 교육을 노리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 이래로 전기 작가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문학 작품은 독자에게 예술적, 심미적 경험을 제공하고, 허구(虛構)의 가공을 통해 현실과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허구는 독자가 규범화된 현실을 벗어나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활보하는 걸 가능케 해준다. 또 문학 작품은 우리가 겪었거나 겪었을 법한 일을 실제인 듯 기술함으로써 독자가 과거를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작가는 작품의 집필 단계에서 이미 작가적 주관성을 발휘한 예술작품을 지향할 것인지, 아니면 ‘있었던’ 사건을 역사성에 기반해 재구성한 기록으로서의 문학을 추구할 것인지 글쓰기의 목표를 정할 것이다.
문학이 역사를 인식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을까? 예술성과 학술성, 이 두 측면을 함께 충족하는 전기는 어떤 식이어야 할까? 신화적 판타지는 경계하되, 가능성의 세계를 활보하는 전기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개연성의 공간을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자연스레 전기(傳記) 문학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20세기 초 유럽 모더니즘 문학의 기수 중 한 명인 오스트리아의 작가 로베르트 무질은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 속 주인공의 입을 빌려, 진리를 찾는 학자가 되고 싶지만 동시에 자신의 주관성을 구현하는 것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다고 고충을 토로(吐露)한 바 있다. 그의 고백은 본질상 소설 형식이 인식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의 타진이었다.
가능성의 세계를 역설했던 그는 ‘열린 문을 통과하는 자는 그 문에 견고한 문틀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고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이 말은 내게 중요한 상징으로 다가왔고,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종의 주도 동기가 되었다. 흔히 열린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가 펼쳐질 것을 기대하지만, 그 세계는 문틀이라는 범위가 허용하는 반경 내에 있다. 이때 문틀은 이미 정해진 팩트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열린 문을 지나서 마주하게 되는 가능성의 공간은 실제성에 기반을 둔 개연성의 공간이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 고증에 기반했음을 자처하는 수많은 소설, 드라마, 영화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이 기본 원칙이 너무 쉽게 지켜지지 않고 있다. 작가와 독자 대중은 역사에 대한 ‘객관적’ 접근보다는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을, 기대하는 바를 역사소설과 전기문학에서 확인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룬 독일 작가 디터 퀸은 방대한 분량의 문학 전기를 쓴 작가이다. 그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 역사적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독일 (문-)학계에서도 매우 독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전기는 숙명론적 역사관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대신 그는 미지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가능성을 선험적 상상력으로 메워 넣는다. 그의 전기 문학은, 본서의 제목처럼, 역사라는 실제성을 다양하게 변주해 가능성의 세계를 하나씩 깨어나게 한다. 이 책은 현 시대에 적절한 전기소설 및 역사소설의 형태가 어떠해야 하는지 분석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전기와 역사소설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상 소설의 형식과 서술기법에 관한 연구이다.
이 책은 크게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I부는 문학과 역사의 오랜 경쟁적 공생 관계를 관찰하고, 전기 및 역사소설 현상을 한 사회의 시대적 관심사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1920년대, 또 1970년대 독일에서 전기 문학이 크게 유행한 배경과 양상을 관찰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에 한국 사회를 전기물 광풍에 몰아넣었던 이른바 ‘전기물 신드롬’ 현상에 대해서도 분석하였다. 또 로베르트 무질이 말한 ‘가능성’ 개념이 디터 퀸의 전기소설에서 어떻게 새롭게 규정되고 실현되는지 비교하였다. II부에서는 실험적인 형식과 새로운 개념을 지닌 전기를 (독일-) 문학의 계보 어디쯤에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관찰하고 있다. 나아가 영웅사관에 매몰된 기존의 전기, 그와 달리 이를 철저히 배격하고 구조사적 역사관을 지향하거나 혹은 몽타주, 언어실험을 도입한 전기를 비교 분석하였다. “역사, 새롭게 다시 보기” 챕터에서는 역사 및 전기 기술에서 ‘우연(성)’이 어떻게 그럴듯하게 처리되어왔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 자리한 이데올로기 등을 집중 분석하였다. III부는 베토벤, 괴테, 오스발트 폰 볼켄슈타인 등 주로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 예술가 전기를 배치했다. 전기 기술의 새로운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 위주로 다루었다. 특히 15세기 독일어권의 걸출한 시인이자 기사이고 정치가였던 볼켄슈타인을 다룬 전기 『나는 볼켄슈타인』은 단언컨대 문학과 역사학이 상호보완해 최상의 결과물을 도출한 모범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전기문학은 오랜 세월 동안 문학과 역사학의 중간에 놓인 채 독자적 장르로 발전하지 못했다. 이는 독일이나 한국 모두에 해당한다. 본인은 이 책이 독일 전기문학 연구로 한정되지 않고 전기문학 장르 일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이해되기를 바란다. 지난 수년간 전기 및 역사기술 방식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진행하였고, 이제 그간의 작업을 한 권의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이 책이 전기문학에 대한 건강한 담론 조성에 기여하기 바라며 책소개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