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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 2026년 3월호

🌐  [연구서적 소개]

한국경제의 기업가적 기원: 한상룡과 조선실업구락부 연구

(빈서재, 2025년 12월)

김명수 (계명대학교 일본어일본학과)

1. 한상룡 연구의 시작과 그간의 사정

필자가 본서의 주인공 한상룡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사논문의 주제를 고민하던 당시 지도교수와 상의하던 중 한상룡이라는 흥미로운 인물을 알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특급 친일파로 알려져 있으나, 한상룡은 한국 기업가의 기원을 연구하기 위한 대상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살았던 1880년부터 1947년까지의 67년은 한국 자본주의 발달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군사력을 앞세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속에서 한국 사회가 근대화라는 과제를 동시에 마주해야 했던 격동의 시기이기도 했다.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한상룡이라는 이름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그의 역사적 중요성을 확인하면서 연구 주제로 그를 선택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만 연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던 것도 사실이다.

연구는 한상룡의 구술 회고록인 『韓相龍君を語る』(1941)을 번역하면서 흐름을 파악하는 작업에서 출발했다. 당시에는 번역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한상룡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번역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한상룡이라는 인물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한상룡을 말한다』(혜안, 2008)이다. 일기 원문은 발견되지 않아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한상룡은 상당히 꼼꼼하게 기록을 남긴 인물로 보인다. 그의 회고록은 일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구술된 것으로 보이며, 내용의 상당 부분이 당시 신문 기사 등을 통해 교차 확인된다. 이 회고록은 경성제국대학 경제학부에서 시카타 히로시(四方博) 교수에게 경제사를 배운 사쿠라이 요시유키(櫻井義之)가 구술 원고를 정리해 간행한 것이다. 필자는 이 자료를 토대로 한상룡의 기업 활동을 정리하여 석사논문으로 제출했다. 이후 2000년 박사과정에 진학한 뒤에도 한상룡과 조선실업구락부에 대한 연구를 계속 이어갔다.

한상룡은 일제강점기에 자타 공히 ‘조선의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로 불렸다. 시부사와는 흔히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1840년부터 1931년까지 막부 말기, 메이지기, 다이쇼기, 쇼와기를 아우르며 활동했다. 이는 일본이 개항 이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어 자본주의 경제 구조를 형성하고, 이후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해 식민지 경영을 확대하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시부사와는 국가 정책과 협력하면서 기업가로서 성장한 이른바 정경유착형 기업가이기도 했으며, 일본 재계의 중진으로 약 500개에 달하는 은행과 회사의 설립 및 경영에 관여했다. 또한 그는 유럽으로부터 자본주의 제도와 기술, 각종 근대 문물을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는 일본 자본주의의 코디네이터, 오거나이저, 후원자 등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약 600개에 이르는 공공 활동에도 참여했다. 2024년 7월부터 발행된 일본 1만 엔 지폐의 초상 인물로 시부사와가 채택된 것도 이러한 역사적 평가와 무관하지 않다. 한상룡은 이러한 시부사와를 평생의 롤모델로 삼았으며, 실제로 일제강점기 한국 자본주의의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된다. 다만 식민지 시기라는 역사적 조건과 그의 식민지적 성장이라는 측면이 한상룡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필자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인 기업가들에 주목하고자 했다. 일본이 한국 경제를 장악하고 식민지 지배의 경제적 기반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 경제의 주된 행위자로서 활동했던 한국인 기업가들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친일적 행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을 단순히 친일파로 규정해 역사에서 삭제해 버린다면, 일제강점기 한국 경제가 해방 이후 한국 경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필자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으며, 그 출발점을 한상룡이라는 기업가 연구에서 찾았다.

일제강점기라는 정치적 조건이 없었다면 한상룡은 어쩌면 ‘한국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한국인 상층 자본가와 주요 기업가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그는 1920년 창설된 경제단체 조선실업구락부를 해방 직전까지 이끌며 한국 재계의 중심적 인물로 활동했다. 이러한 점에서 한상룡은 일본의 시부사와와 마찬가지로 한국 경제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수행한 기업가였다고 볼 수 있다.

2004년 10월 박사논문을 준비하던 중 필자는 일본 문부과학성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34세의 나이에 일본 게이오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사실 그 이전에도 한 차례 기회가 있었지만 모친의 투병과 병간호로 인해 포기한 바 있었다. 그러나 34세가 되면 국비유학생 지원 자격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결국 투병 중인 모친을 두고 유학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모친은 2005년 5월 소천하였다. 죄송한 마음이 컸지만, 공부에 전념하라는 유언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처음에는 1년 반 정도 연구생 신분으로 자료 수집을 마친 뒤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주변의 권유로 게이오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었다. 학위 취득이 늦어질 것이라는 고민도 있었지만 결국 연구를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게이오대학에서의 박사논문 역시 한상룡과 조선실업구락부를 주제로 진행되었으며, 이전 연구의 연속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빠르게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한 1996년부터 계산하면 약 15년의 시간이 흐른 셈이다. 게이오대학 박사과정 중이던 2007년부터 2년 동안 경제학부 연구조수를 지냈고, 이어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조교(유기 계약직 교원)로 재직하며 약 5년간 교원 생활을 경험했다. 이후 2012년 3월부터 계명대학교 일본학과(현재 일본어일본학과)에 일본경제 담당 교수로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본서의 주요 내용

본서는 대한제국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 한국인 기업가의 형성과 활동을 분석하고, 식민지기 조선경제에서 한국인 기업가·재조 일본인 기업가·식민지 권력 사이의 상호 관계를 해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식민지기 조선 재계의 핵심 인물이었던 한상룡과 그가 주도한 경제단체 조선실업구락부를 중심으로 식민지기 경제 구조와 기업가 활동의 실태를 실증적으로 분석하였다.

서장에서는 연구의 문제의식과 연구사를 검토하면서, 식민지기 경제사 연구가 산업 구조나 경제 통계, 식민지 정책 분석에 집중되어 온 반면 실제 경제 활동의 핵심 주체였던 기업가 집단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부족했음을 지적한다. 본서는 이러한 연구 공백을 인식하고 기업가를 식민지기 경제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행위자로 설정하여 분석의 중심에 놓는다.

제1부에서는 대한제국기 경제 변동 속에서 한상룡이 어떠한 사상적·사회적 배경 속에서 성장했는지를 분석한다. 일본 유학 경험과 문명개화 사상의 수용, 한성은행 경영 참여, 일본 실업 시찰 등을 통해 대한제국기 경제계에서 형성된 그의 기업가적 활동 기반을 검토하였다.

제2부에서는 일제강점기 초기와 1920년대 경제 환경 속에서 한상룡과 조선인 기업가의 활동을 분석한다. 한상룡은 한성은행 경영을 통해 금융 분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1920년 조선실업구락부를 창설하여 식민지 조선 재계를 연결하는 핵심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장기 불황과 금융 환경의 변화 속에서 한성은행의 경영 위기가 심화되면서 그의 기업 활동 또한 일정한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보론에서는 식민지기 조선의 신탁업 제도 형성과 조선신탁주식회사의 설립 과정을 분석하여 식민지 금융제도의 변화와 통제 체제를 검토하였다. 이 조선신탁의 설립을 주도한 것이 한상룡이었다.

제3부에서는 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 하에서 조선 재계의 변화와 한상룡의 활동을 분석한다. 이른바 ‘만주 붐’과 전시 경제 체제 속에서 조선 재계와 기업가 활동이 정치 권력과 밀접하게 결합되는 과정을 검토하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상룡의 활동이 정치적 귀결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밝혔다.

종장에서는 이상의 분석을 종합하여 식민지기 조선경제의 형성과 운영 과정에서 한국인 기업가가 수행한 역할을 재평가하고, 이를 통해 식민지기 경제 구조와 해방 이후 한국경제 발전 사이의 역사적 연속성을 제시하였다.

3. 본서의 학문적 의의

본 연구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의의는 식민지기 조선경제를 분석하는 데 있어 기업가를 핵심 행위자로 설정하고, 식민지 경제 구조 속에서 그들의 역할과 기능을 실증적으로 규명했다는 점에 있다.

기존의 한국 경제사 연구는 주로 지주제 연구, 산업 구조 분석, 식민지 경제 정책 연구 등에 집중되어 왔으며, 실제 경제 활동을 담당했던 기업가 집단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특히 식민지기 기업가들이 해방 이후 친일 문제와 결부되어 정치적 평가의 대상이 되면서, 이들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오랫동안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본서는 이러한 연구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한상룡이라는 대표적 기업가와 조선실업구락부라는 경제 조직을 중심으로 식민지기 조선 재계의 구조와 네트워크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식민지기 조선경제가 단순히 식민지 권력이나 일본 자본에 의해 일방적으로 운영된 체제가 아니라, 조선인 기업가·재조 일본인 기업가·식민지 권력이 상호 관계 속에서 형성한 복합적인 경제 구조였음을 실증적으로 제시하였다.

특히 한상룡을 식민지기 조선 재계의 조직자이자 조정자로서 분석함으로써 기업가 네트워크와 경제 조직의 작동 방식, 그리고 식민지 권력과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설명하는 새로운 분석 틀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의 차별성과 학문적 의의는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확인된다.

첫째, 기존 기업가사 연구가 개별 기업이나 특정 산업에 초점을 맞추어 왔던 것과 달리, 본서는 식민지기 조선 재계 전체를 분석 대상으로 설정하고 기업가 네트워크와 경제 조직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식민지기 조선경제의 구조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연구 지평을 제시하였다.

둘째, 기존 연구가 민족기업 또는 식민지 협력이라는 이분법적 평가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었던 데 비해, 본 연구는 식민지 권력과 조선인 기업가 사이의 복합적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식민지 경제의 ‘회색지대’를 실증적으로 규명하였다.

셋째, 한상룡과 조선실업구락부라는 핵심 사례를 통해 식민지기 조선 재계의 구조와 정치경제적 역할을 통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식민지기 경제 구조와 해방 이후 한국경제 발전 사이의 역사적 연속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하였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는 식민지기 조선경제의 구조와 작동 방식을 기업가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재구성함으로써 한국 근대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분석 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학문적 의의가 크다.

끝으로 본서는 2010년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과 이후 발표한 연구 성과를 재구성하고 보완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발간 시기를 미루다 이제야 일단락을 짓게 되었지만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적지 않다. 최근 축적된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점 또한 한계로 남는다. 앞으로 한상룡의 저술을 보다 정밀하게 분석하고, 조선실업구락부 기관지 『조선실업구락부회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도 진행할 필요가 있다. 기회가 된다면 한상룡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기업가들의 조선 경제 인식과 일본 제국권 내 기업가 네트워크를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한 연구서를 별도로 집필하고자 한다.

– 목 차 –

서장 : 시각과 과제 
제 I 부 한말 한국경제의 식민지적 재편과 한상룡의 활약 
제 1 장 문명개화론의 수용과 대일본 인식 
제 2 장 한성은행의 개조와 대한제국기의 기업활동 
제 3 장 일본 실업시찰과 한말의 재계활동 

제 II 부 일제강점기 식민지적 성장과 그 한계 
제 4 장 한상룡의 식민지적 성장과 한성은행 
제 5 장 조선실업구락부의 조직과 활동 
제 6 장 성장의 한계와 기업활동의 위기 
보론 : 일제하 조선신탁주식회사의 설립과 신탁업 통제체제의 확립 

제 III 부 (준)전시기 조선재계와 한상룡의 정치적 귀결 
제 7 장 1930년대 전반 조선재계의 동향과 한상룡의 재계활동
제 8 장 전시기 조선재계의 동향과 한상룡의 정치적 귀결 

종장 : 결론과 전망 

후기와 부록